현자와의 대화

인어 사냥, 차인표

눈 부시도록 빛나는 2024. 8. 19. 23:45

 
 
'인어 사냥'
나는 '인어'라는 대상에 대해 환상이 있었기에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제목이었다.
그런데 작가가 배우 차인표?
차인표 님이 소설책을 쓰셨다길래 책을 담았다.
다들 나와 같이 호기심에 책을 펼쳤다가 단숨에 읽었다는 후기가 몇 보였는데,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 정도로 기대 이상이었다.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아이들이 어릴 때, 아내를 잃고 어린 남매를 혼자 키운 어부 덕무.
그의 딸이 폐병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게 된다.
딸 아이의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을 다 하겠다고 다짐했건만 할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고통 속에 죽어가는 딸을 보며 슬픔과 좌절감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공영감이 나타나 기름 한방울을 딸에게 먹였다.
며칠을 숨쉬기 괴로워하던 아이가 기침을 멎게되는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준 그 어유는
‘인어 기름’이었다.
어떤 병이든 낫게하고 1000년동안 더 살 수 있게 한다는 불로장생의 인어 기름은,
생명 주머니가 있는 어미 인어를 고와 만들어야 한다.
딸을 살리기 위해 공영감이 알려준 위험한 섬에 목숨을 걸고 들어간 덕수는 마침내 인어를 잡아오게된다.
덕수는 남매로 보이는 새끼 인어 두마리를 잡아 왔지만, 당장 약으로 쓸 수 없었다.
너무 어려 생명 주머니가 없을지도 모르는 누나 인어를 잡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하던 며칠간,
덕수의 아이들은 자신들과 서로 의지하며 사는 남매 인어에게 정을 붙이고 이름까지 지어준다 - 찔레와 짱아
새끼 인어를 잡아오면 새끼의 울음 소리를 듣고 어떻게든 찾아온다는 어미 인어.
그런 모성애를 이용해 어미 인어를 잡으면 된다고 주장하는 공영감은,
욕망에 눈이 멀어 누나 인어를 절벽에 거꾸로 매달아 울 때까지 때리기까지 한다.
덕실이는 안다.
울어도 다독여줄 엄마가 없는 아이는 울지 않는다는 것을.
본인이 느꼈던 처연함과 설움을 똑같이 느끼는 찔레와 짱아를 보며 동질감을 느꼈던 영실이는,
절대로 어유를 먹지 않겠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목숨줄이 길어진다해도 그건 사는 것이 아니라고.
그건 죽은 어머니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영실이와 동생 영득이는 다죽어가는 찔레와 짱아를 공영감으로부터 빼내어 집에 데려다 주기로 한다.
노련한 어부들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위험한 바위섬으로 혼자 배를 몰아 떠난 영실이.
그 후의 이야기와 반전 포인트는 이 독서록엔 남기지 않겠다.

 
어떤 내용인지만 보고 자려했는데, 순식간에 여러 장을 단 숨에 읽어버렸다.
차인표 님이 이렇게까지 필력이 좋으실 지 몰랐다.
장면을 묘사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문장들이 몰입감을 더해주었다.
이야기 전개도 탄탄하고, 교차하여 전개하는 시놉시스도 흥미를 더해주었다.

산과 들에서 인간이 개를 데리고 꿩 사냥을 하는 것처럼 바다에서 강치를 데리고 물고기 사냥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단 한 순간도 기다리려 하지 않았다. 미래의 생장보다 현재의 약탈이 중요했다. 자신의 대에 모든 것을 가져야만 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연이 얼마나 많은 것을 품고 있는지 미처 알기도 전에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이 구절에 밑줄을 쳐 둔 이유는 인간의 욕심이 없었다면 정말 인간이 개를 데리고 다니듯 강치를 데리고 사냥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비둘기나 부엉이와 같이 하늘을 활보하는 조류를 길들여 편지 배달을 시키는 것처럼,
물길에는 강치를 앞세워 물고기 사냥을 했다면 어땠을까.
물고기를 많이 잡아 좋겠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개와 사람이 교감을 느끼며 끈끈한 정을 나누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처럼,
강치와 사람 또한 그런 교감을 느끼며 살아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큰 마음이다.
한때 사람에게 우호적이었다는 강치를 마구잡이로 사냥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강치를 비롯한 많은 동물들에게 미안함이 크게 다가왔다.
바위를 내 마음에 얹은 것처럼.


 


천 개의 질문 중 단 하나만 허락된다면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 단연코 ‘왜’라는 질문이다. ‘왜’는 목적이 아닌 동기를 묻는 것이고, 끝을 조준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왜’는 ‘너의 의도는 선하냐, 악하냐?’를 묻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제각각 뱉은 의미 없는 말들이 갈 데를 모르고 방향 없이 떠다녔다.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 앞에서, 아무도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쓸모없는 말들만 부유하고 표류할 뿐이었다.

어머이가 없는 아이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아.

 


눈송이 같은 찔레 꽃송이들이 둘의 귓불을 스치며 하늘로 올라갔다.

이 장면은 밑으로 떨어지는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이었다. 떨어지는 장면을 꽃송이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으로 묘사하다니, 그의 표현력에 감탄했다.



욕망은 무엇일까.
기름을 앞에두고 싸움을 벌이는 이들을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인어 기름을 앞에 둔 마을 사람들 모두 다들 저마다 필연적인 욕망이 있다.
더 오래살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큰 사람도 있겠지만,
다친 아들을 살리고 싶은 마음, 아픈 부모를 더 오래 옆에 두고 싶은 마음, 죽어가는 딸을 살리고 싶은 마음,
이런 마음들이 모여 이기적인 모습을 만든다.
이기심이란 꼭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다.
내가 모르는 타인보다는 나, 그리고 나와 가까운 가족이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들이 이기심의 연장선이고 욕망의 출발선이다.

내용이 너무 무겁지 않아 어떤 줄거리가 펼쳐질까 흥미진진하게 읽어내려갔던 소설이지만,
읽는 내내 인간의 욕심과 탐욕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단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