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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2

by 눈 부시도록 빛나는 2024. 1. 13.


아이의 방학으로 아껴두었던 휴가를 사용했다.
오늘의 조각조각을 서랍에 저장해 두기.

#1.
집 앞에 있는 산에 올랐다.
산 보다는 동산에 더 가깝지만 아침 일찍 찬 바람을 맞으며 언덕 길을 오르니, 기분이 상쾌하다.
언덕을 오르면서 호흡이 가빠지니 평소보다 찬 공기를 더 들이마시게 된다.
상쾌한 공기가 내 폐를 한 바퀴 더 돌고 나면 그 찬기가 폐를 돌고도 모자라 뇌까지 돌고 나온게 아닌가 싶다.
평일 아침에 아들이랑 이렇게 한가롭게 산에 올라 여유를 느끼니, 은퇴 후 노후를 즐기는 순간이 온 것 같은 느낌이다. 파이어족이 느끼는 여유란 이런걸까.
’역행자‘를 읽다 보니, 회사에 오래오래 다녀야겠단 생각보단 돈이 돈을 벌게 하고 생각보다 일찍 은퇴하는 것도 좋겠다란 생각이 든다. 물론 말처럼 쉽진 않겠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다.
그들에겐 무료하고, 아니 지겹도록 천천히 흐를 수도 있는 지루한 일상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모습이 오늘은 무척이나 부럽고 나에겐 특별한 순간이다.



#2.
아이가 가자고 조르던 이탈리안 식당에 갔다. 오랜만에 둘만의 외식이다. 이렇게 좋아하고 맛있게 먹을 줄이야. 아이가 먹고 싶은 걸 사줄 수 있단 사실이 너무 감사한 순간이다.



#3.
영화를 보았다. 오랜만에 대낮에 영화를 보니 느낌이 새롭다.
포켓몬 컨시어지.
간단히 말하면 포켓몬 리조트에 일하게 된 주인공이 그곳에 사는 포켓몬들을 돌보는 이야기다.
어린이 영화를 보다 하나의 깨달음을 얻어 적어둔다.

활기차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피카츄들과는 달리, 어느 소년의 피카츄는 조용하고 사교성이 없다.
소년은 주인공에게 자기 피카츄가 다른 피카츄처럼 시끄럽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한다.
주인공은 그 피카츄를 데리고 높이 있는 놀이기구를 태우기도 하고, 산에 올라가서 메아리 울리도록 소리지르게도 하고, 매운 것도 먹여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가서 친구들이랑 놀아보라고 피카츄의 등을 떠미는 소년을 보니, 아이의 성향을 무시한 채 등을 떠민 과거의 할머니 혹은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할머니는 사내 녀석이 왜이렇게 숫기가 없냐는 말을 보태기까지 했다. 다른 피카츄들을 보며, 피카츄는 원래 이래야 해, 제 피카츄는 ‘피카츄’ 답지 않아요. 라고 말하는 소년.
소년은 자신의 피카츄를 자신이 정의한 ‘피카츄’다움과 비교한다.
피카츄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느낌과 사랑하는 주인이 원하는대로 해주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안타까움. 그 안타까움은 주인보다 피카츄 본인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육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와 다른 성향의 아이를 키울 때 부모는 더 이해하기 어려워하고 속 터져한다.
쟤는 왜이렇게 정신이 없을까, 쟤는 왜이렇게 소심할까, 쟤는 왜저렇게 눈물이 많을까?
그리고 자신의 성향, 성격을 강요한다. 아이의 성향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친구랑 어울리는 게 쉽지 않은 소극적인 아이에게 아무리 친구랑 잘 지내보라고 말하거나 그런 상황에 아이를 밀어넣는다고 해서 아이가 변하진 않는다.
오히려 아이의 마음이 더 힘들 뿐.
아이 본인도 맘처럼 되지 않아 엄마 보다 더 속이 타고 괴로울 것이다.
그 아이의 성향 자체를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성숙한 부모라는 것을 피카츄와 소년을 보고 느꼈다.

영화에서 피카츄는 끝까지 큰 소리를 내보지 못한 소극적인 피카츄로 남았고, 주인공과 고라파덕, 주인과 함께 좋은 추억을 만들고 포켓몬 리조트를 떠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공이 선물해준 피카츄&고라파덕 그림을 보고는 멀어져가는 섬을 향해 처음으로 크게 소리 지른다. 피까피까~~~~~~.
ㅋㅋㅋㅋㅋㅋ 글로 쓰니 참 웃긴데,피카츄의 피카피카 소리를 듣고 나는 울었다.
사람의 옷을 벗기는 것은 결국 바람이 아니라 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며, 아이를 내몰지 말고 기다려주자란 다짐도 했다.



오랜만에 아이를 위해 사용한 휴가는 지극히 일상적이었지만 너무나 행복한 하루였다.
일상이 주는 편안함과 행복함.
함께 하는 시간들.
나와 함께 한 한 조각 한 조각의 추억들이 아이에게 좋은 감정으로 오래오래 남아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