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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와의 대화

작별인사, 김영하

by 눈 부시도록 빛나는 2024. 9. 18.

 

이야기는 인간의 공감 능력을 이용해 인간들을 끼리끼리 결속시킵니다. 같은 이야기를 믿는 인간들은 그 이야기를 믿지 않는 다른 인간들에게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굽니다. 전쟁이 벌어지고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모두 어떤 이야기를 믿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이 음모를 꾸민다는 얘기, 조선인이 대지진을 틈타 우물에 독을 탄다는 얘기, 마녀들이 밤마다 끔찍한 저주를 행한다는 얘기.

 
역사를 돌아보면, 이 책의 로봇이 말대로 어떤 이야기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크고 작은 전쟁과 갈등이 있어왔다. 같은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은 서로 뭉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악으로 여기며 배척했다. 과거도, 지금 이 시각에도 - 인간은 같은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어렴풋이 알던 이야기를 인간이 아닌 제삼자(이 책에서는 로봇)에 의해 담담한 목소리로 평가받으니 '맞아, 우리가 그렇지.' 란 생각에 숙연해진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믿고, 다른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배척하지 않았는지 돌아본다.
이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에 정말 진리가 있을까 싶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이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진실이라 여기는 것들에 대한 믿음으로 사람들을 통제한다. 
 

이제 명상을 끝내고 뭔가 다른 것을 하고 싶지만 몸이 없기 때문에 다시 생각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슨 생각이 떠오르든. 그 생각을 실행할 방법이 없었고. 그러자 생각을 계속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울적해졌다. 생각, 생각, 생각. 생각에서 벗어날 방법이 전혀 없었다. 나는 오직 잠이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몸이 없는 상태에서는 잠도 오지 않았다. 차라리 이십사 시간 깨어 있고 싶었던 게 얼마 전인데 항상 각성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은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막상 몸이 사라지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몸으로 해왔는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몸 없이는 감정다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볼에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이 없고, 붉게 물든 장엄한 노을도 볼 수가 없고. 손에 와닿는 부드러운 고양이 털의 감촉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채 동이 트지 않은 휴먼매터스 캠퍼스의 산책로를 달리던 상쾌한 아침들을 생각했다. 몸이 지칠 때 나의 정신은 휴식할 수 있었다. 팔과 다리가 쉴 새 없이 움직일 때, 비로소 생각들을 멈출 수 있었다는 것을 몸이 없어지고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배고프면 먹고, 고통은 피하고, 잠이 오면 안전한 곳을 찾아 몸을 뉘어야 한다. '오즈의 마법사'의 허수아비가 인간들은 참으로 번거롭겠다고 불평했던 바로 그것들이 나한테는 귀한 선물이었다. 
.. 그것은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달콤했다. 아침에는 요란한 새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피곤한 몸으로 잠들 수 있다는 것, 아침이 되면 새롭고 상쾌한 기분으로 깨어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이 책에서 한때는 휴머노이드였지만 육신을 잃고 정신만 살아있던 철이는 위와 같이 묘사했다. 이 부분을 기록하는 이유는, 내가 가진 육체로 인해 당연히 누리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로봇에 비해 인간에게 공들이거나 챙겨야 하는 성가신 것들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가져오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가 인간의 정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들은 상당하는구나 싶었다. 시원한 물을 먹었을 때의 쾌감과 같이 육체의 욕구를 해소하였을 때나, 뜻밖에 자연이 가져다주는 풍요로움과 황홀한 감정까지- 육체가 있어야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이었구나 싶다.
 
24시간 깨어있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정신을 클라우드에 백업해 두고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 세상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철이를 보니, 그런 상태가 과연 좋을까 다시 생각해 본다. 불행이 있어야 더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노동이 있어야 휴식이 얼마나 달콤한 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육체의 피곤함이 있어야 육체를 쉬게 하는 잠이 더 달콤할 수 있다는 것도 다시 한번 느낀다. 
 
우리는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을 때, 어디까지 사람으로 볼 수 있을까? 잘린 팔을 보고 사람이라 하지 않는다. 하지만 머리만 잘려 있는 사람이 있다 했을 때, 그 머리는 그 사람이라고 본다.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머리라면, 신체적으로는/물질적으론 그 머릿속에 있는 뇌라면, 아니, 그 뇌 속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이라면, 클라우드에 떠다니는 휴머노이드의 정신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 시간도 꼼짝 않고 움직이기 어려운 나는, 사지가 마비되면 얼마나 괴로울까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너무 끔찍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읽고 나니, 정신만 살아있는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훨씬 더 고통스럽겠구나 싶었다.
 
최근에 영화 Uglies를 보았다. 이 영화와 이 책이 시사한 바 중 꽤나 비슷한 점이 있다.
영화에서 사람들은 특정 나이가 되면 완벽한 외모를 갖는 수술을 받게 되고, 모두가 아름다운 외적 모습을 하고, 편안한 도시에서 모두가 평등하고 평화롭게 산다. 알고 보니 그 수술은 외적인 모습뿐 아니라 사람의 정신 상태도 개조한다. 개개인의 자아(Identity)를 없애기 때문에 수술 전에 개인의 인간관계의 깊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잊어버리고 아둔한 삶을 살게 된다. 그들은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통치 아래 위기의식 없이 행복한 착각에 빠져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 중 깨어있는 몇몇은 그런 편안하지만 인위적인 삶을 포기하고, 인간다움을 찾기 위해, 나다움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도시를 떠나 자연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그리고 모든 생물이 그러하듯 자연스럽게 늙어가며 죽음을 맞이한다.
이 책에서 선이라는 복제형 인간은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임을 본인 스스로 잘 알고 있음에도 정신을 보존하는 대세에서 벗어나 더 자연스러운, 인간다운 방식을 선택한다. 누구보다 더,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 죽음을 맞이하기로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죽음을 두려워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있기 때문에 그에 반하는 방향으로 인간의 기술은 발전한다. 혹은 우리가 이루지 못한 기술을 상상한다. 그런 소재의 책과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내용은, 그 안에서도 자연스러운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 
내가 영화 속의 수술을 앞둔 '어글리'라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불완전함이나 불행을 망각한 채 완벽한 모습으로 살 것인가? 인간의 모든 감정을 느끼며, 심지어 나의 불완전함과 고통마저도 직시하며 살 것인가?
내가 책 속의 '민이'라면? 기억이 초기화되어도 또 다른 모습으로 새로운 삶을 살 것인가? 마지막 기억과 인연을 끝으로 더 이상 고통받지 않는 삶을 살 것인가?
비슷한 주제를 다룬 책과 영화를 단기간에 접하며 생각이 많아졌다.
 

모든 과학자가 그렇듯이 그저 더 나은 것을 만들려는 마음뿐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저는 감정과 윤리를 가진, 진짜 마음이 있는 휴머노이드가 이 냉혹한 세계에서 파멸하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저는 가끔 생각해요. 인간을 창조한 신이 정말 있다면 이런 고통을 겪었겠구나, 아니 겪고 있겠구나.

 
과학자들은 사람의 감정을 느끼는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처음엔 신기해 하지만, 그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 버리거나 방치하는 등 나중에는 기계, 폐기물을 대하듯 했다. 사람의 습성과 감정을 느끼도록 만들어졌음을 잘 앎에도 불구하고. 버림받는 휴머노이드들은 그들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그리고 그들의 동족을 지키기 위하여 인간들에 대항한다. 그렇게 자신의 창조물이 망가지고 폭력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는 과학자. 우리를 만든 하느님도 같은 안타까움과 고통을 느꼈셨겠구나 싶다. 
 

내 삶의 모든 기록이 거기 있었다. 이제 한 번스인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클라우드로 올라간 것들은 그대로 거기 머문다. 이 디지털 구름은 끝없이 형태를 바꾸며 영원히 존재한다. 수십억 대의 카메라가 전 세계에서 모든 것을 찍어 어디론가 전송한다. 그리고 백업한다. 그 어떤 권능과 기술도 이 모든 것을 일거에 삭제할 수 없다. 21세기 모든 인간의 삶은 수증기처럼 증발해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그 어딘가에 뭉게뭉게 피어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최근에 읽은 '수확자'가 생각이 났다. 그 책에는 클라우드 시대를 넘어 선더헤드라는 거대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의 수준과 속도를 보면 이런 미래가 정말 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종이호랑이'의 한 챕터에 나온 것처럼 인공 지능이 모든 것을 다 추천해 주고 관리해 주기 때문에 그들 아니면 할 수 있는 게 점점 없어지고, 편리함을 넘어서 심지어 나의 감정까지도 인공지능이 설계하는 날도 올 것이다. 기분 나쁨을 참지 못하고 인공지능에게 기분이 나아질 방법을, 상황이 나아질 방법을 찾아 늘 한결같은 감정을 느끼게 하려고 할 날이 정말 올 것이다. 애플 와치로 심박수, 걸음수, 바이오리듬 등을 체크하고, 내가 좋아할 만한 노래와 책, 식당을 추천받으며 사는 우리에게 이 책에서처럼 우리의  취향과 수준, 선호도에 따라 최적화된 짝을 추천받아 모든 데이트와 감정에 간섭받게 되는 날이 생각보다 금방 올지도 모른다. 그런 날이 오면 우연이란 것은 없어지고 인공지능이 설계한 삶이 우릴 이끌 것이다. 영화 '트루먼 쇼'에서처럼  인공지능이 잘 짜놓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이 오면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지..  
요새 격하게 체감하고 있는 인공지능이란 위대한 기술이 가져다주는 두려움과 겹쳐 이 책들과 영화들이 나에게 참 크게 다가왔다. 기술의 덕을 보고 있는 나이지만,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싶은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