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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하고 싶어 떠난 여행 - 발리

2024-02-24 울루와뚜 비치에서 한적함을 배우다

by 눈 부시도록 빛나는 2024. 3. 20.


도시에서 벗어나 바닷가 근처 숙소에서 맞는 아침
답답한 시내에 있다가 탁 트인, 끝없이 펼쳐지는 인도양을 보며 아침을 먹으니 마음이 뻥 뚫린다.
 

싱글핀 레스토랑


아침을 먹고 짐을 한가득 챙겨 슬로반 비치로 내려갔다.

우리가 묵는 숙소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바로 슬로반 비치가 있어 접근성이 참 좋았다.
다음에 슬로반 비치를 여행 일정에 넣는다면 이 숙소에 다시 묵고 싶을 정도로 뷰와 바다와의 거리는 최고였다.

블루리조트앤스파 인피니트 수영장




슬로반 비치는 밀물과 썰물의 차가 크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밀물이어서 바다가 입구까지 가득차 거친 파도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신난 건 서핑을 하는 사람들 뿐이었다.

 

썰물 시간이 다될 때까지 우리는 숙소에서 자유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자유 시간 동안 나는 수영장에 앉아 책을 읽고 싶다고 했더니 아이가 반기는 내색을 보였다.
의외의 반응에 혹시 혼자 있고 싶냐고 물어봤더니 혼자서 특별한 건 할 건 없지만 혼자 방에서 만들기를 하고 싶다 했다.
보름을 넘게 하루 종일 아들이랑 계속 붙어 있었더니 아이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보다.
나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맥주병 하나를 따서 수영장으로 향했다.
아, 내가 좋아하는 시간-


날씨는 퍽이나 좋았다.
햇살이 무척이나 뜨거워 눈도 제대로 뜨지 못 할 지경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푹푹 찌는 더위가 괴로울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 습하고 뜨거운 바람이 참 사랑스럽다.

나는 더운 나라에 잘 맞는 사람이다. 
아이가 발리의 더위에 땀을 찔찔 흘리고 있었을 때도, 나는 혼자서만 뽀송뽀송했다.
간혹 땀이 가슴을 흘러도 그 더위를 즐겼다.

여행 와서 이렇게 여유롭게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책을 읽을 수 있다니.
이런 여행이 얼마만인지, 아니 그런적이 있었나 싶다.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이 안 되었던 여행지에서 그런 것은 사치였다.
그리고 아이가 더 어렸을 때는 아이 옆에 늘 붙어있었어야 했기에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어차피 이런 걸 원하는 여행이라면
굳이 해외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주변 관광지에 돌아다니지 않고 이렇게 숙소에만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거 나에게 큰 행복감을 줄 수 있다면
굳이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하루 이틀 시간 내어서 가까운 곳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엄마와 어머니 연세가 많아지면서 점점 체력도 떨어지시니 꼭 굳이 먼 해외가 아니어도 좋은 숙소가 딸린 한국의 명소를 찾아가 보아야겠다.
한 달살기가 아니어도 이런 여유 있는 시간을 만들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겠다.

맥주를 한 잔 마시면서 해변가의 바람을 맞으며 일기를 쓰는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하다.
이것이 여행이고 이것이 진정 힐링이구나 싶다.


어제는 남부 투어를 통해 바다 구경을 하느라 바빴다.
투어를 하면서 각 비치에 진입할 때마다 입장료를 내야 한다.
그렇게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바다에서 우리는 다른 분위기와 풍경을 잠시 눈에 담고,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물론 사진으로 그 기억들을 잡아둘 수는 있지만
사진을 찍느라 귀한 풍경들을 놓친게 아닐까 하고 아쉬움이 들었다.
이렇게 입장료 내고 들어가서 잠깐 사진 찍고 나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이건 내가 원했던 여행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중간에 마음에 드는 위치가 있어서 그 곳에서 아이랑 한 시간 가량 수영이라도 하고 온 것이 위안이 되었다.
여행에서 중요한 건 사진이 아니다.
중요한 건 아이가 같이 수영하자고 했을 때, 머리가 젖거나 수영 후에 씻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기꺼이 물에 들어가는 것이고,
아이랑 같이 이 여행을 추억했을 때, '우리 그 때 같이 수영했던 바다'라고 묘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진 잘 나오는 바다가 아니라.
 
이번 여행에서 나는 혼자만의 시간, 심심함, 무료함들을 맘껏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랑 단 둘이 간 여행이었기에 그런 시간보다는 아이와의 추억 만들기에 집중이 되어갔다.
틈틈히 책을 읽거나 기록을 남기며 원래의 목적을 이루려 했으나
아이가 놀자하면 책을 덮고 수영을 했다.
맥주를 마시며 선베드에서 노래를 듣고싶었지만
아이가 놀자하면 같이 만들기를 하며 가위질을 했다.

나는 생각했다.
아이랑 같이 함께 온 여행에서 책 몇자 더 읽는다고 내가 뭐가 나아질까.
여행 중에 어디선가 본 글에서 아이의 유년기를 '부모님이 가장 친한 친구였을 때'라고 묘사한 문구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래, 지금 나는 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고, 지금은 가장 친한 친구랑 여행 온 시간들인데, 그리고 이제 아이가 사춘기가 지나고 나면 그 때는 부모님이 아닌 자신의 친구들과 놀러다니기 바빠질텐데, 다시 안 올 그 귀한 시간들인데,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런 황금 같은 시간들을 흘려보내는 걸까.
아이가 나를 원할 때 아이에게 시간을 내주는 것이 최고지.
나중에 가서 역으로 매달리기보다 현재에 집중해서 아이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는게 맞지.
 


휴식을 취하는 늙은 노부부와, 더위도 못 참으면서 엄마 옆에서 만들기 한다고 바리바리 싸가지고 나온 우리 아들


우리가 수영 할 때부터 우리의 선베드 옆에서 쉬고 계신 늙은 노부부가 정말 인상적이다.
할머니는 비키니을 입고 선베드에 누워 낮잠을 주무시고, 할아버지는 그 옆에서 잡지를 읽고 계신다.
여유있는 노후가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나도 나중에 남편이랑 둘이 이런 바닷가에 놀러와서 여유로운 노후를 즐기고 싶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결코 쉽진 않으셨겠지만, 서로의 아픈 몸을 챙겨주며, 지팡이를 서로의 손으로 함께 포개 잡고선 그렇게 천천히 걸어나가는 여행도 참 좋겠다.
그래서 내가 계획한 비치들을 다 가보지 못해도 나중에 남편이랑 같이 와야지란 생각에 아쉽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