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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와의 대화

김구의 백범일지를 읽고

by 눈 부시도록 빛나는 2024. 3. 12.
해월 선생이라고 우리는 교주를 찾아봤지만 어떤 특별한 글이나 도수를 전수받기보다는 그들과 그들이 전도에 온 명단을 공식적으로 허락해 주는 어떤 증명서만 받았다.
…  아니라 힘이 없는 농민들 조차 무리 지어 다니며 위협을 했으니 이것을 깡패와 같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행태를 보고 동학 군이 총을 가지고 민가로 다니며 곡식을 걷는 강도 행위를 엄금하는 것은 무척 잘한 일이다. 현명한 사람을 구하는 글을 돌려 절리 인체를 구 할 것이라는 전략과 전군을 구사는 직결시키고 훈련한다는 계책이 좋다. 모든 일에 인제 와 교육을 무척이나 중요함으로..



그동안 나는 동학이란 어떤 하나의 학문이고, 동학 운동은 민족 운동으로 알고있었다.
백범일지 읽다 보니 동학은 하나의 종교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선교를 강요하고 전도를 많이 할 사람을 추대하는 것이 꼭 다단계 같기도 했다.
민족 운동을 하기 위해 더 많은 운동가들을 모집하기 위한 방법이 종교와 비슷했을 수도 있다.

물론 동학운동을 통해 기존 세력의 부정부패에 맞서는 자주적인 운동이라는 점은 가치를 높이 평가받을만 하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그렇게 동학 운동이란 이름 하에 죄없는 양반이나 농민들까지 위협하고 강탈하는 도적과 같은 행위를 서슴없이 했다는 점이다.
정치든, 종교든, 운동이든 처음 시작할 때의 뜻은 원대하지만
꿈을 실현시키는 과정 중에 부패와 부조리, 그리고 원래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는 무리들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김구 선생님이 뱀범일지를 통해 전한 내용을 보면,
’동학‘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입교하기 보다는 누가 몇 걸음 만에 어디까지 가더라, 누가 밥을 몇 끼를 먹는다더라는 기이한 소문으로만 동학을 따르는 이들도 있었다 한다.
현실에서의 고통과 막막함을 동학이란 것이 모두 해결해줄 것이라 믿고 싶어 무지한 상태에서 맹신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김구 선생님이 묘사한 상황을 보니, 그때도 역시나 소문은 빨랐고 빨리 퍼지면 빠질수록 진실과 멀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보다 정보를 빠르고 쉽게 얻을 수 없는 만큼 옆 사람으로부터 들은 내용이 진짜라 믿었고,
사실인지 의견인지 거짓인지 파악하려는 최소한의 마음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동학도 천주교처럼 만민의 평등함을 기본 교리로 삼고 있었다.
여러 교리가 있었겠지만 이 평등의 교리 덕에 계급차의 설움을 갖고 있던 서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계급과 상하관계에 대해 반감을 갖고 양반에 대항할 수 있게 만들고
서민들을 똘똘 뭉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동학에서 강조한 바로 이 만민의 평등함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양반은 동학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겠지.
자신들의 발 밑에 있던 농민들이 동학이란 이름 아래 힘으로 똘똘 뭉쳐 자신들을 위협했으니..





표어로는 ‘척양척왜斥洋斥倭(서양과 왜를 배척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일본이 더 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이 우리나라 보다 더 빠르게 서양의 문화와 무기를 받아 들었기 때문이라고를 말한다.
우리나라가 망한 이유는 명성황후와 대립 했던 흥선대원군이 빠르게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자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정말 과연 그랬을까?
과거의 결과만 알고 있는 우리는 가보지 않은 또 다른 길의 결과는 알 수 없다.
내가 주식을 팔았더니 더 올랐다, 그때 더 샀으면 좋았을 걸.. 이라고 말하는 결과론적인 이야기들과 다름이 없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를 많이 알지 못하는 나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미래를 결정하는 과거와 현재의 여러 나무가지들 중에 하나를 선택했을 뿐 똑같은 결과를 야기했을 수도 있고 일본의 침략 보다 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겠다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물론 김구 선생님이 원하셨던 것은 이미 무너진 조선 뒤에 우리 나라를 서양과 왜가 아닌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끌어나가는 것을 원하셨던 것임을 안다.
김구 선생님이 스승님의 꼬장꼬장함과 옛것에만 고집하는 것을 보고 답답해하셨던 것처럼
일부 깨어있단 사람들 조차도 새로운 학문이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무조건 배척하기도 했다는 점이 안타깝다.
그런 점에서 조선은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국수적이었다.
성리학, 유교에만 묶여 실질적으로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돌아보지 못했다는 점이 무척이나 아쉽다.
조선 시대와 같은 시기에 다른 국가들이 발전시킨 산업과 문명들이 무척이나 대비된다.
실제로 동학 농민운동이 벌어졌던 1800년대 말에 미국은 아래 사진과 같이 발전해있었다.
결과가 더 좋아졌을지, 나빠졌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나라도 서양 문물을 더 빠르게 받아들였다면 1900년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이을까?

사진출처: https://youtu.be/CgRpsWSBbow?si=KYdphJs0y68pgriU








김창수는 김구 선생님의 본명이다.
해선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검색하면 동학농민군에 ‘김창수’란 이름을 볼 수 있다.
팔봉산 밑에 산다하여 팔봉접주 김창수라 불렸다 한다.



안 진사의 조부 인수仁壽는 진해 현감을 역임했다. 그 후 많은 재산을 가난한 일가에게 나누어주고 청계동으로 들어오니, 이곳에서 산천이 수려함과 족히 피난처가 될 만한 곳을 취함이었다. 그때는 장손인 중근이 두 살 적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는 퍽 소탈했다. 비록 무식한 하류들에게까지 조금도 교만한 빛이 없이 친절하고, 틀림이 없어서 상류건 하류건 간에 다 그에게 호감을 가졌다. 얼굴이 매우 청수했지만 술이 과하여 코끝이 붉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청계동 안진사의 맡아들이 바로 도산 안창호였다.

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에는 우리에게 낯익은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모두 한 뜻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서로 인연이 닿기도, 스치듯 지나가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위대하고 훌륭한 애국자와 역사에 길이 빛나는 일을 해내는 큰 인물들이 쏟아져 나올 것을 믿는다. 그와 함께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대한민국을 자신의 나라로 알고 평생을 자기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다.



문화의 힘.
김구 선생님은 일찍이 이 문화의 중요성과 그 강력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우리나라 3천만 인구의 작은 나라가 그리스, 로마의 문화처럼 세계를 장악하게될 것이란 것도 알고계셨다.
그리고 어느 민족도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었기에 우리도 그럴수 없다라고 공상하지 말라 하셨다.

이것은 비단 우리 민족의 문화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적용될수있다.
앞서 누군가 이루지 못했다해서 대단하지 않은, 평범한 내가 그럴 수 없다라는 것은 나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두는 것이다.

김구 선생님이 믿어 의심치 않으셨던 것처럼,
정말 우리 나라에는 큰 일을 해낸 젊은 남녀들이 많이 나왔다.
여러 분야에서 1등을 휩쓰는 한국인들은 다행히도 김구 선생님의 말씀처럼 본인들이 대한민국 사람이란 것을 자랑스러워 하며 태극기를 높게 든다.

한국의 문화가 세계 곳곳에 퍼져 한국인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시면 김구 선생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이번 발리 여행에서 몸소 느끼고 있던 찰나에 이 문구를 읽으니 내 마음이 벅차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한국인지 먼저 묻거나 한국말로 인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국인이라 하면 젊은 사람들은 모여들기도 하고,
BTS를 아는지, 자기가 보는 한국 드라마나 노래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K culture라고 하는 이름 아래 어느 영상에나 댓글에서 외국인들의 반응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워지게 하는 영상에는 간혹 김구 선생님의 지혜와 앞을 내다보는 눈, 그리고 그와 함께 누리고 싶은 이 기쁜 마음과 뿌듯함이 느껴지는 댓글을 볼 수 있다.
이 작고 작은 나라의 존재와 우리가 가진 문화를 세계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해주는 날이 온 것을 보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지.




김구선생이 70여년 인생동안 외치던 소원.
첫째는 자주 민주, 둘째는 대한민국의 자주독립, 셋째는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고 외치던 그 소원.
그 소원이 이루어진 세상에서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지, 내가 얼마나 행복한 세상에 태어났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대한민국이 독립한다면 우리 독립 정부의 가장 미천한 문지기가 되어도 좋다라는 김구 선생의 말에 내 마음이 경건해진다.
지금 내가 타지에서 우리나라의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자유를 누리고 대우를 받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지.




김구 선생은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고 있다 하셨다.
종교 밖에선 예수님을 하나의 성인으로도 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새로운 시각을 느꼈다.
나는 한 분이 하느님을 믿지만, 여러 종교에 대한 포용력을 김구 선생님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