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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와의 대화

꿀벌의 예언, 베르나르 베르베르

by 눈 부시도록 빛나는 2024. 3. 23.

렘봉안, 드림비치

 
 
오랫동안 소설 책을 읽지 못했다.  성장을 위한 발전을 하고 있지 않다 라는 죄책감에 소살 책을 읽는 시간은 사치 라고 생각했다.
시험 기간이면 평소에는 잘 안하던 피아노를 치고 싶거나, 책을 읽고 싶다거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공부를 해야 하는 시기에 오히려 나는 소설책이 읽고 싶었다. 그러면 나는 여유가 생기면 시간이 남으면 읽자고 나를 다독이거나 자제시켰다.

이번 여행에서는 나만의 시간을 갖고 오롯이 나의 집중 하기 위해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하기로 해 보았다. 요가 수업을 듣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생각하고 사진 찍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 듣고.

발리에 온지 얼마 되지않아 렘봉안 섬에서 에메랄드빛 파도가 너미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책을 읽었던 그 여유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거칠게 넘이치는 파도와는 다르게 나의 마음은 그 어느때보다 고요했고 평온했다. 사람은 역시 휴식이 필요하단 걸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다. 글자와 글자 사이에 띄어쓰기가 꼭 필요한 것처럼.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발리에서 나는 나를 한발자국 멀리 떨어져 보며 진정으로 한템포 쉬어 가고 있구나.

여행지에서 꿀벌의 예언 1,2권을 모두 읽었다.
이 책에서 내가 현생과 전생을 넘나들며 전생에 탈래 이게 신의 모습 소자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나타난다. 살랭은 자기가 아는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르네가 전하는 이야기를 해석 한다. 이 구절을 보며, 신이 언제 누구에게 발현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어느 예언자가 해석하느냐에 따라 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다르게 전해 질 수 있었겠다 라는 생각이 든다. 모세가 전 한 이야기는 하느님이 의도한 바가 맞았을까? 혹은 우리가 믿고 있는 카톨릭 교리들은 정말 하느님이 원하는 것일까에 대한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교황께서는 이교도들과의 전쟁에 참여할 모든 이들에게 면벌부를 주려고 하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차지하고자 벌인 십자군 전쟁.
기독교는 자신들이 믿는 유일신이 아닌 다른 신을 모시는 이슬람교를 제거하려 한다. 이 전쟁의 당위성이 필요했던것이었을까?
 
이 소설을 통해 십자군 전쟁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wiki 참조)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신께서 (전쟁을) 원하신다."라는 말로 십자군 기사들을 움직였지만, 이것은 교황의 뜻이지 신의 뜻이 아니다. 천주교를 믿는 나는 교황님을 존중하지만, 과거의 교황들이 자행해온 악행은 받아들일 수 없으며, 비탄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꿀벌의 전쟁 2권에 나오는 아래 구절이 무척이나 와닿았다.

 

생각해 보면 모세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식으로 해석해 전한 것일 수도 있어요. 가령 하느님께서 〈하늘을 날지 말라〉고 하신 걸 모세가 도둑질하지 말라고 이해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하느님께서 비행기는 등유를 태워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대기를 오염시키니 타지 말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을 모세가 곡해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 역사에 대한 관점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 그 많은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예수가 이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멜리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메넬리크를 쳐다본다. 「그의 말을 전한 사도 바울로 덕분이 아니었을까. 바울로는 천재적인 소통과 조직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어. 그리스도의 경쟁자들한테는 바울 같은 마케팅 책임자가 없었지.」

 
과거에 있었던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것들을 기록한 옛 문서들이 생겨났다.
말한 사람의 의도와는 다르게 받아들이는 사람들, 거기에 적힌 활자들을 자신의 배경과 지식으로 해석하는 후대 사람들을 통해
사실은 또 다른 신화를 만들어 내었고, 의도와는 다른 문화와 악습을 만들었고, 하느님이 원하는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세상이 흘렀다.
 
현재 교회가 믿고 있는 성경과 교리, 그 중 정말 하느님의 뜻이 제대로 전해지는 부분이 몇 퍼센트나 될까? 성경은 비유와 암시를 포함하고 있고, 그 구절들은 세대나 문화, 학자마다 다르게 해석한다. 이것들을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진리는 무엇일까?
내가 어렸을 적 따르던 교리가 내가 성인이 되고서 나서 교회법이 바뀌었다며 바뀐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그 때 처음, 교리는 불변하는 진리가 아니구나, 내가 믿고 따르는 것이 언젠가는 또 바뀔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성서가, 교회가 말하는 구절 중 내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 당시의 문화를 토대로 쓰인 성서는 지금 세대에선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이런 부분들까지 우리가 모두 따라야 할까? 교황청과 교회법에서 이것은 이게 아니라 저렇게 해석되어야해, 그래서 우린 이제 이렇게 할거야.라고 말하는 부분은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과거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던 군사들이 교황의 말을 믿고 하느님의 뜻과는 먼 학살과 전쟁을 자행했음에도 그들은 그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믿고 또 믿었다. 
나도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처럼 맹신하고 있는 것이 있을까? 하느님이 원하시는거야, 라고 인간이 믿는 것들을, 인간이 믿고 싶은대로 믿어버리는 것을 내가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의심을 품는 것이 죄로 받아들여지는 때가 있다. 그것은 악마가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기 스스로 진리를 찾기 위한 여정을 아예 시작조차도 못하게 하거나,
다른 해석을, 나의 의견을 조심히 꺼냈을 때
그것은 악마가 방해하는 것이라 치부하는 행위는
 모든 것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이끌고자 하는 진짜 악마의 속삭임일 수도 있다.
 
신은 존재한다.
하지만 종교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나는 신을 믿는 사람으로서, "늘 깨어있으라!"라고 말한 예수님의 말을 따르려 한다. 


 

역사학자는 정의를 구현하는 직업이라 해도 무방할 거예요


우린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미래에는 얼마든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 ...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이제 알 듯한데, 어떤 사람이 될지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역사에 대한 관점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 많은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예수가 이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멜리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메넬리크를 쳐다본다. 「그의 말을 전한 사도 바울로 덕분이 아니었을까. 바울로는 천재적인 소통과 조직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어. 그리스도의 경쟁자들한테는 바울 같은 마케팅 책임자가 없었지.」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의 잠재적 가능성을 깨닫는 것이다. 한데 이 가능성이라는 것은 써봐야 비로소 알 수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 아닌가. 우리는 보통 위기의 순간에 그 가능성을 사용한다.


성서에 적혀 있듯이 최후의 순간에 우리는 하나의 질문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너는 너의 재능을 어디에 썼느냐?〉


고정되지 않은 여러 개의 평행 현실이 존재한다는 거야……. 베스파 로슈푸코가 우연히 미래를 보게 됐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를 열었기 때문에) 현재가 변했다는 거지.


이 〈망각〉을 기억에 새기기 위해 우리는 일주일간 효모가 들어간 음식은 먹지 않아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평가하고, 자책하고, 후회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써. 하지만 저 갈매기는 물고기를 못 잡아도 개의치 않아. 금방 잊어버리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동물은 인간처럼 실수와 실패에 발목 잡히지 않아.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건 오히려 무지와 호기심, 신비의 힘이지. 만약 모든 것이 이미 쓰여 있다면…… 우린 행동의 동력을 잃게 될 거야.


에그레고르〉라는 말을 들어 봤는지 모르겠군……. 〈무리〉를 뜻하는 라틴어 그렉스grex에서 파생된 단어야. 에그레고르는 신념을 공유하는 생각들의 집합체라고 이해하면 되네. 우리들의 영혼이 모여 비가시 세계에서 응집력 있는 하나의 구름 같은 걸 만드는 거야. 그레고리오 성가를 들어 봤지? 성가를 합창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단순한 목소리의 합을 넘어 어떤 통일된 소리를 내지 않던가. 에그레고르도 마찬가지야. 집단적 정신이 가진 위력의 표현이지.」


그게 사실이냐 아니냐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사람들은 그 말만 들어도 혐오감을 느껴 왕의 결정을 지지하게 되니까


밀교적 사상인 카발라가 태동했다.


환경 오염이 싫으면 소비를 멈추면 될 거 아닙니까?


애벌레는 마지막이 온 걸 감지하는 순간에 마침내 나비로 변한다


학교 선생님들은 아무렇지 않게 〈넌 똑똑하니까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거야〉 또는 〈너같이 형편없는 녀석은 보나 마나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살 거야〉라고 말한다.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 선생님은 제자에게 뭐라고 말할까? 〈거봐라, 내 예언이 적중했잖니. 넌 딱 내가 예상한 그 모습 그대로야〉라고 하지 않을까?


예언이 저절로 실현된다는 말은 우리가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입에 올리는 순간 그것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다.


기술 분야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발견된다. 1965년, 인텔의 창립자인 엔지니어 고든 무어는 반도체 칩의 연산 능력이 18개월을 주기로 두 배씩 향상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자 컴퓨터 업계에서 이 숫자에 목을 맸고, 결과적으로 그 예측이 그대로 실현됐다.


40년의 수명 연장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의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이제 인간들은 거리를 두고 사물을 바라보고 일상의 자잘한 고민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게 될 것이다.


예언을 읽었으니 이제 살뱅에게 불러 주는 일이 남았어. 그래야 비로소 매듭이 지어지는 거야. 시간이 접혀 과거와 미래의 두 원이 마침내 하나로 만나게 되는 거야.